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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홍콩 민주화 운동

[기사] 홍콩 100만명 시위 뒤엔 “한번도 존중받지 못했다”는 절망감_인천대 장정아 교수 (한겨레신문 2019.6.15)

by 몰. 2019. 11. 2.

[토요판] 이슈
홍콩 반정부 시위 배경
97년 반환 뒤 ‘일국양제’ 말하면서도
애국주의 교육 강요, 직선제 불허 등
중국의 ‘통합’ 압박에 홍콩인들 반발

홍콩은 중국에 대한 비판 가능하고
중국인 목소리 바깥으로 내보내는 곳
중국이 외부와 연결되는 ‘열린 공간’
“홍콩의 움직임 홍콩만의 문제 아냐”


▶ 중국으로의 범죄인 인도를 허용하는 범죄인 인도 개정법안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 참여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홍콩 정부는 일단 12일로 예정됐던 개정법안 심의를 연기했지만, 시민들은 개정법안 완전 철회를 요구하며 16일에도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예고하고 있다. 장정아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장(중어중국학과 교수)이 이번 시위의 배경과 의미를 분석했다.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We’ll be back.)

2014년 홍콩인들이 행정수반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도심을 점령했던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이 79일간의 점령 끝에 해산될 때 시민들은 이 배너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난 몇년간 상황은 암울했다. 우산혁명 때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나 단체는 점점 신뢰를 잃거나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감옥에 갔다. 다시 많은 홍콩인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엔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주일간 홍콩에서는 세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있었다. 지난 4일엔 천안문사건 30주년 추모집회에 18만명, 지난 9일엔 중국으로의 범죄인 인도를 허용하는 법안(조례) 개정 반대행진에 103만명이 참여했다. 의회의 법안 심사 통과가 예정돼 있던 지난 12일 시위대는 다시 도심을 점거했다. “우산이 다시 펼쳐졌다”며 세계가 홍콩을 주목하고 있다. 법안 심사가 미뤄지고 경찰이 폭력적으로 과잉진압하면서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싸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궁금증이 쏟아진다. 중국으로 범죄인을 인도한다고 해도 그 일이 홍콩 인구(706만명)의 7분의 1이 나올 만큼 중요한가? 문제의 핵심은 중국에 대한 홍콩인의 공포와 반감인가? 이 상황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홍콩인의 시위에 언제나 따라붙는 ‘반중’이라는 투박한 규정은 그 안의 다층적 의미를 덮어버린다. 4일 천안문 집회를 주최한 단체는 ‘애국민주운동을 지원하는 홍콩 시민들의 연합회’였다. 반중 집회에 애국은 왜 들어갈까? 애국이란 이름으로 모여 촛불을 든 이들은 왜 1주일 뒤 중국을 거부했나? 이번 시위의 의미는 단순한 홍콩의 반중 시위를 넘어선다.

​조국에 좋으면 홍콩엔 더 좋다?

범죄인 인도 관련 개정법안(이하 개정법안)은 홍콩이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지 않은 나라들에도 용의자를 쉽게 넘겨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발단은 지난해 20대 홍콩 남성이 대만에 같이 갔던 홍콩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사건이었다. 속지주의(자국 영토 바깥에서 발생한 범죄는 불처벌)를 채택한 홍콩에선 이 남성을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었고, 정부는 이 일을 처리하려고 올해 초에 개정법안을 부랴부랴 내놓았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의 특수한 관계, 그리고 현재 홍콩의 제도적 한계 탓에 문제가 발생했다.

현행법을 보면, 범죄인 인도 시 홍콩 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개정 뒤에는 의회 심의라는 문턱이 사라진다. 행정수반과 법원의 결정으로 범죄인을 잡아서 인도할 수 있으며, 특히 법원은 문서의 검토만 가능하다. 일반적인 국가에선 타국에서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면 여러 요건을 검토해 결정하며, 특히 자국민의 경우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정법안은 홍콩 시민이건, 심지어 비행기 환승으로 잠시 홍콩을 거쳐 가는 외국인이건 모두 잡아서 인도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 보기엔 홍콩인의 항의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의회의 심의를 안 거치더라도 행정수반과 법원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겠는가, 짐작할 테니. 하지만 홍콩의 행정수반은 시민의 직선으로 뽑히는 게 아니라 친정부파가 다수인 선거위원단의 투표로 선출되고 중국 정부의 최종임명을 받는다. 따라서 홍콩인을 보호하려고 중국 쪽의 요청을 거부하기란 매우 어렵다. 게다가 행정수반은 시민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범죄인을 인도하더라도 제도적으로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다.

개정법안은 정치적 관점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이미 투자를 취소한 외국 기업이 있고, 홍콩에 있는 여러 국가의 기업협회가 반대 성명을 냈다. 국제상업도시로서 홍콩의 지위가 쇠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 법안을 겨우 20일 동안 의견수렴을 거친 뒤 통과시키려 하는 데 홍콩인은 더욱 분노했다. 보수 성향의 변호사협회, 종교단체, 교육단체, 그리고 정부 관료를 지냈던 이들도 반대하고 나섰지만, 개정법안이 철회될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현재 홍콩 의회는 친정부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탓이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부터 이어진 기형적 선거제도로 인해 여론이 의석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 앞서 시민의 반대가 많았던 법안들도 결국 대부분 통과됐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홍콩이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그 관여와 압박이 심해져 홍콩인의 저항을 불러왔다면, 홍콩에 대한 중국의 ‘일국양제 실험’은 실패했는가. ‘일국양제’는 한 나라 두 체제, 즉 중국이라는 지붕 아래 사회주의(중국)와 자본주의(홍콩)가 공존하는 제도를 말한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영국 식민통치를 받던 홍콩의 주권 반환을 요구하며 창안한 유례없는 통일 원칙이다. 이 제도의 실패 여부는 그리 간단히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일국양제 자체가 내용과 상황에 따라 모양이 달라질 수 있는 그릇이고, 중국과 홍콩의 관계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22년 동안 계속 변해왔다.

반환 초기 중국 정부는 홍콩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이 밀월기에 중국에 대한 홍콩인의 귀속감은 높아지고 있었다. 낯설기만 하던 중국인 신분을 받아들이고, 중국이라는 ‘조국’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환 뒤 홍콩은 더 나아질 것이며, 조국이 좋으면 홍콩엔 더 좋다’는 약속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2003년 국가에 대한 반역·선동·전복 등을 금지하는 국가안전법을 입법하려던 정부의 시도는 50만명을 길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입법은 보류됐고 이것은 반환 뒤 중국에 대한 홍콩인의 싸움 가운데 드문 성공 사례로 남았다. 반면 중국 정부는 홍콩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

그 뒤 중국 본토와 홍콩을 연결하는 각종 인프라 건설을 위해 홍콩의 재정을 투입하는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특히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며 홍콩 북쪽의 농촌마을 여러곳을 철거해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 거센 반대가 일었다. 홍콩 고유의 생활방식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비판, 이 모든 것이 과연 홍콩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 왜 홍콩 정부는 중국 본토와 홍콩을 통합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지, 그것만이 정말 홍콩을 위하는 길인가 하는 의구심이 강해졌다. 이러한 물음이 던져질 때마다 돌아오는 홍콩 지도자의 답은, 홍콩인은 중국에 통합되는 것 외에는 살길이 없으며, 중국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홍콩인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일방적 애국주의를 강요하는 국민교육 시도, 지도자 직선제 불허, 그리고 고속철도 출입국 심사의 편의성을 이유로 홍콩 일부 지역에서 중국 법을 시행하는 이른바 ‘일지양검’(一地兩檢)까지, 최근까지도 숨 가쁘게 많은 일이 홍콩인들의 반대 속에 추진됐다. 중국 정부가 강조하듯 홍콩이 중국 덕분에 경제위기를 이겨낸 것은 맞지만, 많은 사건과 위기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중국도 언젠간 민주를 배워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모든 홍콩인이 정부 정책에 늘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본토와의 왕복이 편해지는 데 찬성하는 사람도 많고, 본토 남성과 홍콩 여성의 결혼도 크게 늘고 있다. 특히 경제적 통합과 민간의 통합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본토인은 매일 150명의 쿼터로 홍콩에 이주해 와서, 반환 뒤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본토인이 홍콩인이 됐다. 중국은 멀리 있는 두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홍콩 안으로 끊임없이 스며들어 섞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홍콩인의 깊은 분노에는 시민의 의견이 한번도 제대로 존중되고 반영된 적이 없다는 절망감이 깔려 있다. 아무리 많은 시민이 길거리에 나와 반대를 외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그만큼 깊다. 중국 정부 역시 홍콩인의 ‘애국심’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키워왔다. 더 안타까운 점은, 홍콩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특수한 위상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돼왔다는 사실이다. 홍콩의 학교들에서는 끊임없이 홍콩은 중국의 일부분일 뿐이고 중국이 없으면 홍콩도 없다는 가르침이 반복된다. 교사들은 홍콩 학생의 자부심을 질식시키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중국과 분리되지 않고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도 홍콩인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도록 해줄 수는 없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홍콩이 식민지이면서도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특수한 위상은 냉전시기 영국과 공산주의 중국의 관계라는 독특한 맥락에서 주어진 것으로, 그 자체를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홍콩의 특수한 위상과 상대적 자유를 모두 없애버려야 안전하다고 중국이 판단한다면, 이는 중국에도 위험하고 불행한 일이다. 홍콩의 특수한 위상은 홍콩에만 유리한 것도 아니요, 중국을 꼭 위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산혁명 때 어느 중국 본토 학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중국인도 언젠가는 민주(주의)를 배워야 할 것 아닌가. 홍콩이 민주를 연습하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번 개정법안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콩이 ‘범죄자의 천국’이 되지 않으려면 개정이 시급하다고 하지만, 홍콩이 본토에 비해 좀 더 누리던 자유로움은 전세계 사람들이 드나들며 다양한 상상과 토론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홍콩은 중국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 곳인 동시에, 중국인이 본토 안에서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억눌린 목소리를 외부로 송출할 수 있는 홍콩은, 틀어막아야 할 곳이 아니라 중국이 외부와 연결되고 숨을 쉬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본토와 홍콩 사이에는 연대와 공감이 형성돼왔다.

이러한 연대와 공감은 본토와 홍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무력감과 불안 속에서 많은 홍콩인이 대만으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 홍콩인 수천명이 이민을 신청했고 현재 1천여명이 정착했다. 원래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던 대만과 홍콩 사람들은 강해지는 중국의 압박 속에서 유대감이 싹텄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과 연대가 대만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지켜봐야 한다.

많은 본토인과 홍콩인, 대만인은 한국을 케이팝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한국의 사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토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탐색하며, 함께 만들어낼 가치를 상상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홍콩의 문제는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의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한다.

이번 시위 직전 홍콩에 갔을 때 한 홍콩인이 말했다. “나는 천안문사건을 알게 된 뒤 중국인임이 자랑스러웠지만, 그건 중화문명 5천년 때문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항쟁 때문이었다.” 주어지는 이름을 거부하고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려는 안간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연대와 공감, 그것이 오늘 길거리에 나와 있는 홍콩 시민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장정아(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장, 중어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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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98020.html#cb#csidx55a45d66b2873c3b5851bd864bdefa4